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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 9월 03, 2009

진회와 최명길, 악비와 임경업 그리고 소현세자

불행한 역사의 시작, 인조반정

임진왜란 중 무능한 선조가 사태 수습을 위해 내놓은 최상의 카드는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고, 임진왜란을 수습하게 한 일이었다. 이미 능력을 검증받은 광해군은 외교와 내치로서 임진왜란의 정국을 안정시키고, 왕위에 오른다. 이미 그는 출신 성분 때문에 많은 도전을 받아왔고, 신하들도 그의 편은 아니었다.

광해군의 강한 반발은 피의 숙청을 불렀고, 영창대군과 임해군을 숙청하고, 인조의 친동생인 능창군까찌 숙청한다. 능창군은 어린 나이지만, 충분히 왕재가 될만큼의 자질을 가지고 있었다. 왕재로 가장 떨어지는 인물이 바로 인조였던 것이다.

인조반정으로 얼떨결에 집권한 서인과 인조는 조선 시대 사상 최악의 군주와 신하로 기록되어 있다. 특히, 서인의 외세와 결탁하여 나라를 팔아먹은 김자점은 조선 역사상 최악의 인물이며, 인조와 좋은 파트너가 된 것이 오늘날의 이만수 트리오를 보는 듯하다.

광해군 때까지 명-청 등거리 외교를 유지하던 기조가 미국에만 올인하려는 오늘날의 2MB 정권처럼 일방적 명나라 사랑은 많은 재앙을 가져왔다. 우선 그때까지 잘 지내던 청나라의 반발로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겪었다.

 

무능한 서인이 불러온 호란

당시 총사령관을 맡은 김자점은 아첨 밖에 할 줄 모르는 인물이었고, 그나마 임경업이 있음으로 해서 그만큼 버틴 것이다. 결국 최명길은 현실을 직시하고 주화론을 주장했으며, 이로 인해 매국노니, 나라를 팔아먹은 많은 놈이라느니 강력한 비난을 당했다. 하지만 최명길은 행동은 하지 못하면서, 주장만 하는 놈들의 꼬라지가 우스웠을 것이다.

결국 인조는 남한 산성에서 45일을 항쟁하다가 한강 변의 삼전도에서 무릎을 꿇고 항복을 하기에 이르른다. 조선 군주 최초이자, 최악의 꼴을 당한 것이다. 인조의 못남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강화조약의 결과로 소현세자 부부와 갓 19살 난 동생 봉림대군과 함께 중국의 센양(오늘날의 심양)에 끌려가게 된다.

이때부터 소현세자의 진가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살펴보면, 그는 청나라의 실권자들을 휘어잡고, 서글서글 능글능글한 성격으로 인간관계가 좋게 유지하였다. 그가 있던 심양관은 주청조선대사관으로 변모했고, 많은 영웅들을 불러들였다. 이를 뒷받침한 소현세자빈 강씨는 심양에서 대규모 농사를 짓고, 부를 축적하여 노예로 끌려간 60만 조선인들을 주제해주는 쉰들러 리스트를 작성한다.

그들 부부만큼 내치와 외치의 환상의 결합은 없었다. 1644년 명나라를 공략하러 떠라는 청나라의 맹장 도르곤을 따라 청나라로 가서 서구의 선진 문물을 접한다. 그 해 명나라 마지막 황제 숭정제가 사망하고, 명나라는 멸망하고 잔당만 남게 된다. 소현 세자는 그곳에서 청나라의 국력을 질리도록 실감하게 된다.

한심한 김자점 같은  서인들은 스스로 단 한번의 승리도 거두지 못하면서, 북벌만 주장하는 어리석은 무리였는데, 스스로 전투에 나가지 못하고 그들과 대척점에 있는 임경업을 청나라로 파견하여 명군과 싸우게 하는 한심한 짓거리를 저지르게 된다.

 

성군 소현 세자의 숙청

다음 해, 1645년 소현세자는 돌아오지만, 아직도 반청 주전을 주장하는 쓰레기들에게 둘러 쌓이게 된다. 거의 전패하다 시피 할 정도의 전쟁 수행 능력으로 청나라 정벌을 주장하는 서인 도당들에게 둘러 쌓여, 소현세자는 현실을 직시하라고 충고하고 서양의 문물들을 소개하지만, 인조는 분노하고 벼루를 던져 소현 세자의 이마빡을 깨뜨린다.

인조는 용골대나 도르곤 같은 쟁쟁한 명장이자 청의 실권자들이 소현 세자를 지지하는 것을 보고 들으면서, 왕위 위양에 대한 공포를 느낀다. 결국 두 달 뒤 어의 이형익의 시술을 받은 소현 세자는 얼굴이 새까맣게 변하고, 칠공에서 선혈을 토하는 시체로 발견된다.(인조실록 인조 46권, 23년, 소현세자의 졸곡제를 행하다)

이는 김자점이 뒤를 받치는 귀인 조씨 조소용과  인조의 합작이었다. 인조는 왕족이 사망하면 어의를 중벌에 처하는 관례를 무시하고, 언급조차 금하게 하여, 어의 이형익을 보호했으며, 진상조사를 요구하는 강빈과 신하들의 요구를 무시하고 장례를 지내게 한다. 또한 장례는 평민장으로 진행되었으며, 장례일이 흉한 날이라고 지관 최관을 협박한 강빈의 동생 강문성과 아래의 삼형제를 모두 유배시켜 버린다.

또한 부랴부랴 귀환한 봉림대군을 본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세자에 책봉한다. 선조는 또한 진상 조사를 위해 청나라에서 온 사신들을 잘 따 돌린 공으로 묘지기들과 관리 책임자에게 포상을 하고 벼슬을 준다.

1646년 강빈의 궁녀들인 계향과 계환이 인조의 수라에 극독을 넣었다는 혐으로 투옥되어 고초를 치르다 죽는다. 김자점과 조소용은 이를 계기로 강빈을 역모로 몰아 별당에 유폐하고 사약을 내려 죽게 한다.

그후 강빈의 친정 노모와 네 아들도 모두 역모로 몰아 처형시킨다.  

1646년 소현 세자의 세 아들, 12세, 석철과 8세의 석린, 4세의 석견은 모두 제주도로 유배되고, 2년 뒤 첫째 석철은 장독으로 사망하고, 둘째는 병으로 사망하며, 당시 6세인 석견만 살아남아 봉림대군의 효종 즉위 후 복위되게 된다. 청나라 용장 용골대는 첫째 석철을 아껴 청나라로 데리고 가서 양자로 삼으려 했지만,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한다. 사신은 손자를 죽인 인조를 한탄하며 제주도를 떠난다.

 

진회와 최명길

최명길은 역사를 꿰뚫고 있는 현명한 재상이었다. 금나라 때 여진에 대한 입장은 대부분 악비나 한세충 같은 주전파들이 우세하였다. 그러나 진회는 본인 스스로가 주전론자들의 주장 때문에 포로로 끌려가 온갖 고초를 경험(정강의 변)했기 때문에 현실적인 무력에 대한 강력한 인지를 하게 된다. 주전론만 주장했다가 수도가 함락되고 황제까지 끌려간 남송의 역사가 채 400년도 되지 않았던 것이다.

 

서인과 효종의 북벌론

서인들의 입장에서도 똑똑한 군주를 원하지 않기는 마찬가지 였다. 서인들은 인종 정도로 멍청한 국왕을 원했고, 이미 개혁이나 개방과 현실적인 힘에 눈 뜬 소현 세자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틀림없이 거센 반발과 북인들의 피의 숙청으로 얻은 기득권을 잃을 수 있는 것은 이미 예상된 결과였다. 또한 소현 세자비 강씨의 경영 능력과 그녀를 뒷받침 해주는 강씨 형제들의 괄괄함도 도저히 봐주기엔 너무도 위험한 싹이었다.

형인 소현 세자의 옆에서 그러한 청나라의 국력을 실감한 효종이 과연 진정으로 북벌을 원했을까? 오히려 북벌보다는 호란을 통해 허무하게 무너진 자위력 향상에 그 숨은 목적이 있었음 충분히 예측해 볼 수 있다. 효종으로서는 자위력 향상과 철없은 북벌론자들을 달랠 수 있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는 전략이었다.

우리가 아쉬운 것은 조선 시대 개혁과 개방을 이끌 수 있는 최고의 리더쉽을 가진 지도자 한 명을 잃어버린 것이다. 호랑이 새끼가 되지 못함을 한탄하는 부모는 많아도 자식이 호랑이임을 겁내는 부모를 우리는 유일하게 목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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