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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 9월 03, 2009

고려 역사에서 하공진은 저평가되었다

하공진은 진주 하(河)씨의 시조이자, 만고의 충신으로 그 공(功)이 결코 서희, 강감찬(강한찬)과 비교를 해도 결코 저평가 받을 사람이 아니다. 고려시대 거란은 3차에 걸쳐서 침입을 하였다.


 993년 제1차 거란의 침입은 서희의 담판으로 종결되어 강동6주를 얻었으며,

1010년 제2차 거란의 침입은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1018년 제3차 거란의 침입은 강감찬귀주대첩으로 종결되었다.


그렇다면 제2차 거란의 침입을 종결시킨 자가 누구였던가? 바로 하공진이다. 하공진은 전쟁 종결을 이끌어내고, 그 스스로 볼모로 북경까지 끌려가면서까지 거란 성종의 끈질긴 구애를 거절하고 말을 타고 탈출하려다 결국은 사지를 찢겨죽는 비운의 인물이다.


그런 하공진을 기억하고자 "하공진놀이"라는 것이 조선 후기까지 이어져 왔으나 일제시대 이후 그에 대한 기록과 역사적인 연구는 찾아볼 길이 없다. 진주의 저명한 향토학자들에게 질문을 해보니 자신도 그것을 알고 있기는 하지만 하공진에 대한 자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하여 연구자료를 내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현재 하공진에 대한 흔적을 찾아보려면 경상남도에 있는 진주성 내에 그의 기념비와 사당이 있으며, 하공진의 자손이자 려말~세종 때까지 무려 4대를 걸쳐 벼슬을 한 하륜 대감의 출생지까지 같은 장소에서 찾을 수 있다.


우리는 하공진이 제2차 거란침입의 종결자였다는 것을 다시 한번 기억해야 한다.

댓글 1개:

원창희 :

옳은 말씀을 잘 읽었습니다.
저도 하공진을 위대한 협상가로 발굴하여 집필중에 있습니다.
신간도서 "한국의 위대한 협상가"의 한 사람으로 소개하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