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블로그 목록

목요일, 9월 03, 2009

[역사비사] 한국에도 제갈량의 후손이 있다!!

얼마 전 중국의 모델인 주거쯔치가 제갈량의 63대 후손이라고 대대적으로 보도된 적이 있다. 제갈량은 3c기 한나라(후한)가 붕괴되고, 위촉오의 혼란에서 촉나라 유비의 군사로 활약하던 인물로, 우리나라에도 국민적인 베스트 셀러 <삼국지>의 주요 등장인물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국민들은 한국에도 제갈량의 후손들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지 못한다. 한국에 사는 제갈량의 후손은 <제씨>, <갈씨>, <제갈씨>로 모두 신라 시대에 한반도로 건너온 제갈량의 후손들이다.


한국의 제갈량의 후예

---------------------------------------------위키백과---------------------------

중국 한나라 제갈영(諸葛嬰)의 6세손 제갈량(諸葛亮)이 234년 54세의 나이로 한중의 정군산에서 최후를 맞이하였다. 제갈량은 제갈교(조카이자 양자)와 제갈첨 (장남)을 아들로 두었고, 다시 아들 제갈첨(諸葛瞻, 227년~263년)에게서 첫째 아들, 제갈상(諸葛尚, 247년~263년)과 둘째, 제갈경(諸葛京)이 태어났다. 아버지 제갈첨과 첫째인 제갈상은 263년에 사천의 면죽(綿竹)에서 전사하고, 둘째인 제갈경은 형과 아버지가 전사를 하자, 하동땅(河東)으로 가서 진나라(晉)에서 벼슬을 한다. 처음에는 현령을 하다가, 후에는 강주(江州)* 자사까지 벼슬을 한다.(중국어 위키백과)  슬하에 아들 제갈충((諸葛忠)을 남겼다. (이 내용은 기록되지 않음)


諸葛京字行宗,諸葛瞻的次子。蜀國亡後,遷移到河東。在晉爲官,初爲眉縣令,後爲江州刺史


제갈량의 증손자인 제갈충(諸葛忠)은 한나라가 망하고 아버지와 형이 순절하자 13세의 나이로 신라 미추왕(재위 262년~284년) 때에 입국하였다. 바로 이 제갈충이 현재 한국의 제씨, 갈씨, 제갈씨의 조상이 되는 인물이다.


(필자는 위의 내용으로 볼 때 제갈충은 제갈경보다는 제갈상의 아들임이 더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제갈경의 생사 년대가 불분명하며(대략 230년~280년 이상), 제갈량의 자손을 자칭하는 일족들이 현재 저장성(浙江省) 진화시(金華市)에 제갈팔괘촌을 이루며 살고 있으며, 1992년에 발견된 가계도에 의해면 제갈경의 후손이라고 한다. 역사의 기록에 따르면, 벼슬까지 하면서 안정된 기반이 잡힌 제갈경이 아들인 제갈충을 홀로 신라로 보낸 것도 이해하기 힘들며, 일설에는 공명의 아버지인 제갈규를 시조로 하여, 제갈규의 20세손인 제갈공순이 신라 흥덕왕 때 귀화하여 토착하였다고 하기도 한다. (이쪽이 좀 더 설득력이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제갈규의 아들로 제갈공명의 형제일 가능성이 더 크다는 얘기)



천추태후의 주요 배경이되는 고려 현종 때 제갈홍(諸葛泓)과 제갈형(諸葛瀅) 형제(제갈영(諸葛嬰)의 34세손)가 탄생하는데, 후 일 형은 제씨(諸氏)로 하여 남양군(南陽君)에, 아우 제갈형(諸葛瀅)은 갈씨(葛氏)로 하여 낭야군(瑯琊君)에 봉해짐에 따라 성이 나누어졌다.


칠원제씨와 남양갈씨

따라서 칠원제씨(漆原諸氏)는 한나라 때의 우임장군(羽林將軍)이었던 제갈영(諸葛嬰)를 원조로 하고 제문유(諸文儒)를 중조로 삼아 기세(起世)하고 있다. 중시조 제문유(諸文儒)는 1320년(충숙왕 7) 상왕인 충선왕이 원나라에서 토번(吐蕃, 티베트)로 귀향갈 때 호종하였다. 상왕이 환국 뒤인 1330년에 그 공이 인정되어 벽상일등공신(壁上一等功臣)이 되고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하였으며 구산부원군(龜山府院君, 칠원의 옛 이름)에 봉해졌다. 후손들이 그를 중시조로 삼고 칠원(경상남도 함안군)을 본관으로 하여 대대로 이어오고 있다고 한다.


창원과 마산 위의 경남 함안군 칠원면(다음 지도)


1889년 광무 3년 조선 고종 때 성씨 복원운동으로 조정의 판결을 받아 제 씨와 갈 씨 일부가 제갈 씨로 복성(復姓)하였다. 따라서 현재는 같은 뿌리의 3개의 성이 나눠져 있다.


---------------------------------------------위키백과---------------------------


조선 임진왜란 공신, 제말 장군

진주성에 가면 촉석루 바로 옆에 쌍충사적비가 있다. 이것는 임진왜란 의병장 제말과 그의 조카 제홍록을 기리기 위한 기념비로 이들도 제갈량의 후손들이다. 이들의 공적은 엄청난데도 불구하고 "정기룡", "정문부" 등과 같은 이유로 그들의 공이 부각되지 못하였다. 고성 사람이었던 제말 장군은 의병을 모아 김해, 웅천, 정암, 의령 등지에서 왜적과 싸워서 공을 세워 곽재우 장군과 함께 공적이 조정에 장계되어 성주목사(星州牧使)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채 1년도 되지 않은 1592년 선조 25년 성주 대첩에서 전사했다.


자칫하면 묻힐 뻔했던 그의 공을 부각시켜 준 것은 조선 시대 2대 성군으로 뽑히는 정조이다. 정조는 임진왜란 전쟁 사료를 연구하다가 그 공을 발견하고,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그 공이 (이순신 장군의) 노량대첩에 비해 적지 않다!" (정조실록 16년 35권, 1792년, 7월 25일)


그리하여 정조는 제말 장군을 병조판서에 추증하였고, 충의(忠毅)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의 조카 제홍록 또한 숙부를 따라 의병활동을 한 이후 이순신 장군 휘하에서 활동을 하다가 정유재란 때 전사를 했으며, 정조는 선무공신에 추증하였고 같이 경상남도 진주에 쌍충사적비를 세웠다.

제말 장군을 모신 쌍충사적비, 진주성


일제 때 일본군들이 비를 엎고, 위치를 제맘대로 옮겨다 놓은 것을 시민들이 다시 제자리로 복원을 시켰다. 아마도 제씨와 갈씨의 일부가 고종 때 다시 제갈 씨로 복원한 운동을 펼친 것이 이때가 아닌가 한다.


제말도 저평가된 인물

물론 의병장에서 성주목사로 그 공적을 인정 받았으며, 제말은 정조를 제외하고 좀처럼 역사의 평가를 받지 못하였다. 우리 역사에서 정조가 노량대첩과 비길만한 공적이라는 성주대첩은 아예 조명받지조차도 못했다.


"성주대첩, 그런 대첩이 있었던가?"


이것은 조선왕조실록에도 단 몇 줄의 문장으로 정리되어 버린다. 또한 정조가 공을 살피면서, 어떤 자료를 참고했는지도 문헌에 나오지 않기 때문에 성주 대첩을 추적하기란 쉽지가 않다. 그러한 공에도 불구하고 진주에서 조차 알려지지 않은 이유를 저명한 향토학자에게 물었다. 답은 첫째, 의지가 없다. 둘째, 예산이 없다. 세째, 칠원에서 집중 조명되어야 한다. 등으로 요약되었다.


이상에서 제갈량의 후손들이 우리 나라 고려, 조선을 통해 역사에 적지 않은 기여를 했음을 밝혔다. 1등만 발굴한 지금까지의 현대 역사연구 방법에서 좀 더 제대로된 조명이 필요해졌다. 민주화투쟁, 좌우논쟁 등등에 밀려 지금까지 정작 중요한 역사 제대로 세우기 부분의 연구는 여전히 목말랐다.


현대사에서는 스케이트 전국가대표  제갈성렬과 아시아의 노벨평화상인 막사이사이상을 받은 제정구 의원(경남 고성 출신)과 한나라당의 브레인 역할을 맡은 제성호 교수가 눈에 뛴다.


2000년 인구조사에서 남양제갈씨는 4,374명, 칠원제씨는 16,818명, 남양 제씨는 1,061명이 조사되어 전체 씨족이 22,253명이다.

--------------------------------

※ 자료: 위키백과,  성씨 부분을 제외하고 모두 필자가 쓴 글

* 강주(江州) = 지금의 강소성, 절강성 부분

댓글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