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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 9월 03, 2009

[역사 비사] 고려-조선 8대에 걸친 파란만장한 삶, 이종무

고려 4대

조선 역사를 보면, 막대한 공에도 불구하고, 전혀 조명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곳곳에 숨어있다. 그 중의 한 사람이 바로 조선 전기의 이종무 장군이다. 그는 역사에 단 한 줄의 문장도 아닌 하나의 구(phrase)로만 표현된다.


"대마도 정벌"


이종무 장군은 1360년 고려 공민왕 때 태어나, 1381년 22세의 나이로 아버지와 함께 왜구를 물리친 공으로 우왕 때 벼슬을 하게 되고, 그 후에도 창왕과 공양왕을 거쳐 고려 4대에 걸친 삶을 살게 된다. 고려에서의 그의 삶은 왜구를 퇴치하는 모자라지 않은 무장의 바로 그것이었다.


조선 4대

1392년 조선이 건국되고 그의 이름이 반정세력의 공신록에 오르지 않은 것을 보면, 외적방어에만 신경을 쓰고 중립을 지킨 것으로 추측된다. 그후 태조, 정종을 거쳐 1400년에 제2차 왕자의 난에 태종 이방원의 편에서 싸움을 한 것이 그의 정치적인 편력의 전부인 것이다. 살벌한 태종의 숙청 작업에도 그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그 후에도 중립을 고수하고, 권력을 가까이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태종이 물러나고, 세종이 즉위하자 이종무는 60세의 늙은 노구를 이끌고 왜적을 정벌하기 위해 대마도(쓰시마)로 나선다. 이미 통원군(長川君)에 책봉되어 더 이상 올라갈 자리가 없는 그이지만, 그 때까지 그랬던 것처럼 국가를 위해 외적방어에만 전렴하며 대마도로 출격하였다.

1419년 6월 7일 출전하는 길에 태종 때 숙청된 잔존 세력의 인사들이 종군하여 공을 세워 죄를 씻고자 하였다. 이종무는 세종에게 <김훈>과 <이적>과 같은 인사를 추천한다. 김훈은 문관으로 과거 출세를 했지만, 무력이 뛰어난 자로 이종무가 내심 아까워 하던 자 였다. 이종무의 뜻을 알고 있는 세종은 그들의 종군을 흔쾌히 수락을 한다.


대마도(쓰시마) 정벌

마침내 출전이 이루어 지고, 이종무는 대마도 정벌을 위해 마산포를 출발하여 1419년 음력 6월 12일 주원방포(현 추봉도)에 도착하여 그곳을 보급기지로 삼는다. 6월 17일 대마도로 향했다가, 거센 마파람(남풍)에 휘말려 다시 추봉도로 돌아왔는데 6월 19일 다시 출전하여 다음날 12시 경에 대마도에 도착한다.


한산섬과 붙어 있는 추봉도에서 쓰시마까지는 약 78km 거리이다. 본토 후쿠오카까지는 약 105km 정도

(출처: 다음 지도)


그의 전선은 약 227척 규모로 출전을 했는데 대마도 두지포에 내려서, 군을 정비하고 인근의 적선 129척을 빼앗고 불질렀으며, 가옥 1993호를 불태우고 중국인 등의 포로를 구출한다. 이 과정이 결코 순탄하지는 못했다. 박실 등의 장군이 적의 매복에 걸려 순국하는 사건도 발생했기 때문이다.

6월 20일부터 7월 2일까지 이어진 군사작전을 끝내고, 한 척의 군함 손실도 없이 7월 3일 거제도에 돌아온 이종무는 송유인을 보내 전황을 보고하게 한다. 7월 6일 송유인의 보고를 받은 세종은 무척이나 흡족해 하며, 송유인에게 말 한 필과 옷 한 벌을 상으로 주었다.

대마도 정벌은 마쳤지만 상황은 그리 녹녹치 못했다. 중국에 노략질을 갔다가 돌아오지 해적들이 아직 많이 남았으므로, 본토의 군대와 협력을 하며 지속적으로 대마도를 압박하였다.

결국 대마도주 종정성의 항복으로 정벌은 끝나고, 8월 10일 승전연회를 베풀고, 8월 25일 이종무는 그 공으로 장천군에 봉해진다.

그러나 그가 돌아온 후부터 조정은 모진 견제를 끈질기게 한다. 장천군에 봉해진 몇 일 후부터 이종무는 탄핵을 받기 시작한다. 그들이 처음 문제삼은 것은 작전 중에 적의 기습을 받아 사망한 박실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이었다. 그러나 세종은 끝내 이종무를 감싸준다. 작전 중의 사고를 최고 사령에게 그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논리를 들었다.

두번째로 그들이 문제 삼은 것은 역적의 무리인 <김훈>과 <이적>을 종군하게 하여 공을 세우게 했다는 말도 되지 않는 억지였다. 세종도 그것은 이미 자신에게 보고된 사항이며, 자신도 알고었다고 그를 옹호해주었지만, 그들은 역적의 무리인줄 알면서도 데려갔다고 주장하면서 원칙을세워 이종무에게 역적의 혐의를 씌운다. 결국 11월 1일 이종무는 나이 60세의 노구임에도 불구하고 의금부에 투옥되어 모진 고문을 받는다. 2주 후인 11월 14일 결국 김훈과 노이는 가산을 몰수당하고 관노가 되었고, 11월 17일 이종무가 모진 고초 속에 다음과 같은 발언을 한 것이 세종의 귀에 들어가게 된다.


"늙은 놈이 (정벌에서) 죽고 돌아오지 않았어야 옳았다!"


세종은 자과감에 시달렸다. 장인이라는 이유로 숙청을 당해야 했던 심온과 관비가 된 장모를켜봐야 했던 그 참담한 심정을 다시 한번 경험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종무도 심온이 숙청되었을때미 강상인으로 인해 곤욕을 치뤘던 것이 바로 1년 전이었다.

그 당시의 이종무에 대한 탄핵이 얼마나 세종을 괴롭혔는 지는 당시의 조선왕조 실록의 기록을 봐도 알 수 있다.


1419년 세종 즉위 1년 8월 부터 시작된 탄핵 상소는 이듬해 1420년 8월까지 약 1년간을 끈질기에 세종을 괴롭혔다. 결국 이 사태를 해결한 사람은 상왕으로 물러난 태종 이방원이었다. (이종무보다 나이가 7살이 적다.) 그는 이종무를 도성 밖인 과천으로 내쳐서, 그의 목숨을 구명했다. 비록 그 해에 고신(벼슬 증서?)과 과전을 돌려받았지만, 몸과 마음이 많이 지쳐있었다.


명나라 사은사, 최후의 길을 떠나다 

1421년 12월 7일 세종은 대대적인 인사개편을 단행하면서, 측근을 배치하고, 이종무를 장천부원군으로 삼았다.


1423년 8월 27일 사은사로 부윤 이종선과 도총제 권희달 등을 이끌고 64세의 노구로 북경으로 떠났다가, 1424년에 2월 25일 65세의 나이로 도착하게 된다. 그러나 명나라의 사신으로 따라간 권희달의 경솔한 언행과 부적절한 처신으로 말미암아 이를 보고하지 않은 죄를 물어 다시 한번 이종무를 탄핵한다. 권희달은 "조선에서 진상한 말은 똥을 싣고 다니던 말"이라는 등의 망언을 중국 사람들과 외국 사신들 앞에서 하였고, 아래 사람 등에게 폭력을 휘둘러 국가의 위신을 떨어뜨렸다.


이에 세종도 사람의 인선을 잘못했다고 한탄하였지만, 이미 이종무를 끈질기게 괴롭힌 적이 있었던 영의정 유정현 등은 더욱 더 단합하여 이종무의 책임론을 부각시켰다. 도착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이종무는 다시 책임의 논란에 휩쌓이게 된다.


1424년 6월 이종무는 과천에서 가택연금(부처, 付處)을 당하였으나, 지병으로 인해 연기가 되었다. 이듬해 1425년 1월 14일 이종무는 다시 직권을 회복하고, 과전을 되돌려 받았으며, 아들들도 관직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먼 여정과 무고에 심신이 지친 이종무는 5개월 후인 6월 9일 결국 파란만장한 삶을 마치게 된다.


세종은 내관을 시켜 조상하고, 부의를 하사하였으며 조회를 3일단 열지 아니 하였다. 그의 시호를 양후(襄厚)라고 지으면서, 갑주(甲胄, 갑옷과 투구)로 공을 세웠으니 양(襄-돕다)이요, 생각함이 어둡지 않았으니 후(厚)요, 성질이 순박하고 진실하였다고 아쉬워 했다. 다음의 문장은 세종이 내린 교서에는 그의 상실감이 얼마나 컸는 지를 알 수 있다. (6월 17일)


"만리장성이 갑자기 무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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